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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의료 선교는 닫힌 복음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1885년 의사 알렌은 빈사상태에 빠진 구 한 말의 고위 관리 민 영익을 치료한 공로로 고종황제의 허락과 도움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료시설인 광혜원을 열었으며, 다른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의료 선교는 적진 깊숙이 진지를 구축하여,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의료 선교

 

의료 선교는 의료를 통한 섬김과 의료를 통한 복음 전도이다. 특히 가난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실함으로 섬기는 것이 의료 선교의 하나의 큰 목적이다. 가난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에 함께 하는 일이다.

의료 선교는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다. 크게 의료를 통한 섬김과 의료를 통한 복음 전파가 있다.

 

첫째, 의료를 통한 섬김은 크게 선교 병원, 지역사회 보건 사업, 이동진료를 통한 것이며, 의과 대학의 교수나 간호 대학의 교수나 조교, 약사, 임상병리사, 정신건강사업, 구강 보건 사업, 에이즈 사역, 의대생/수련의 교육, 다른 선교사의 건강관리, 의료 지원을 통한 다른 선교사의 사역을 돕기도 한다. 선교병원을 통한 선교는 가장 전통적인 의료 선교의 방법이었으며, 아직까지도 의료 선교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의료 선교는 우리 나라 사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연세의대병원, 이화대학병원, 고려대학병원, 원주의대병원, 계명대 동산병원, 전주예수병원, 광주기독병원, 안동 성소병원, 부산 침례병원, 일신기독병원, 소록도 나환자마을과 애양원 등을 비롯해 선교사들이 세운 많은 의료 기관들이 아직까지 한국 국민들을 섬기고 있다. 필자가 1995년부터 일하고 있는 네팔에서도 나환자 병원들과 10개가 넘는 선교병원들을 통하여 수많은 네팔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있다.

 

아직도 많은 나라들이 가난하기에 의료 기반이 취약하여 의료선교사를 많이 요청하고 있다. 갈수록 빈부의 격차가 심해져 가난한 나라들이 더 많아지고 있어 다른 나라의 의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라가 더 늘어가고 있다. 국민소득 $900 이하의 가난한 나라가 1968년 24개국에서 1999년 49 개국으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병이 들기 전이나 병이 악화되기 전에 예방 사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의료선교의 한 방법으로 지역사회 보건사업이 시행되어져 왔으며, 가난한 나라의 의료 수준을 향상시키는 좋은 역할을 해 왔다. 이동 진료는 의료 혜택이 열악하고, 복음이 전혀 소개되지 않은 지역의 문을 여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둘째로 의료를 통하여 복음을 전한다. 역사적으로 의료 선교는 닫힌 복음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해 왔다. 미국인 의사 알렌은 닫힌 한국의 문을 여는데 기여를 했으며, 네팔이 200년간 닫혔던 나라의 문을 열고 서구 사회의 도움을 요청했을 때 의료 선교사들이 네팔로 들어와 병원을 세워 네팔을 도울 뿐 아니라, 복음 전파의 초석이 되었다. 의료 선교사는 목회자 선교사를 업고 선교지로 들어가는 역할을 해 왔다.

 

오늘날도 의료 선교사들은 여전히 복음에 문을 완강히 닫고 있는 나라들을 뚫고 들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의료 선교는 적진 깊숙이 진지를 구축하여,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의료 선교사는 직접 복음 전하는 일도 한다. 선교지의 형편에 따라 직접 환자나 병원직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양육을 담당하기도 하고, 현지인 목회자나 선교사를 도우거나 때로는 홀로 교회를 개척하기도 한다.

 

선교병원은 먼 곳의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선교사가 산골짝 골짝 들어가 복음을 전할 수 없지만, 그곳으로부터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병원 내에서 선교사, 아내 선교사가 환자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기도 한다. 방문, 상담, 기도, 전도, 전도지 돌린다. 복음 전파가 법으로 금지된 힌두 왕국인 네팔에서도 선교병원에서 어느 정도 묵인이 되고 있다. 내가 일했던 탄센병원에는 전도자를 유급직원으로 두고 전도를 담당케 하고 있다. 의료 사회의 복음화를 위하여 의대생 전도 및 양육, 의사 성경공부 및 병원 신우회 활성화를 돕고 있다

 

의료선교사는 지역교회의 성실한 일꾼이 되어 교회를 섬기기도 한다. 구역예배, 주일학교, 청년회, 성경공부, 설교 등으로 교회를 섬긴다. 그 외에도 수많은 말씀 전할 기회를 가지고 있다.

 

바람직한 의료 선교의 방향으로 새로운 선교병원을 신설하기 보다 현재 잘 운영되고 있거나 이미 설립된 선교병원을 잘 지원하고, 사람을 보내는 일이 더 실제적이고 효과적이다. 실제로 잘 운영되고 있는 선교 병원들조차도 인력난으로 재정난으로 힘들어하고 있으며 의료 선교사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아직도 1-2주의 초 단기 의료선교를 많이 하고 있으나 선교정탐훈련이나 3-6개월 이상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실제적인 단기 선교로 발전하게 되었으면 좋겠고, 의과대학 시절에 4주에서 3 개월 정도 현지 선교 병원에서 선교를 경험하는 학생 단기선교에 더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선교의 현장으로 오늘도 의료인들을 부르고 계신다. 열매가 희어져 추수할 일꾼을 기다리는 선교의 현장에서 나와 함께 일하자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 양승봉 선교사(네팔, UMN)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49448)

 


 

의료선교의 궁극적 종착지는 복음 전파

 

사단법인 성민원과 군포제일교회가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청소년' 이라는 주제로 10일과 11일 양일 간 지역사회 중고등학교 청소년에게 강좌 시리즈를 제공한다. 해당 강좌 시리즈는 군포제일교회 예루살렘 예배당 2층 비전홀에서 이루어지며 강의방식은 실시간 온라인 줌강의를 활용한 비대면으로 제공된다. 현장에는 군포제일교회 학생들을 포함해 외부의 비기독교인 학생들도 참석할 수 있다.

 

10일 오전 10시부터는 성누가병원 대표 신명섭 원장이 '의료선교의 역사'를 주제로 1시간 30분 강의를 풀어갔다.

 

조선시대 말기부터 서양에서 들어온 크리스천 선교사들에 의해 국내 의료봉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린 신 원장은 조선에서 의료선교의 문을 연 '알렌', 제중원의 2대 원장으로서 조선인을 치료하다 전염병에 걸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존 헤론', 조선 최초의 민간병원을 설립한 의사 '스크랜턴', 폐결핵 전문 의료선교사로 활동한 '셔우드 홀' 등을 소개하며 "이 분들의 삶을 보면서 큰 감명과 도전을 받았다"고 전했다.

 

신 원장은 이어 제중원이 질적으로 향상돼서 의과대학으로 발전한 게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라고 소개했다. 신 원장은 이 과정에서 공헌한 인물이 '에비슨' 선교사로서 그가 국내에서 의과대학 교육시스템을 도입하고 학생들을 길러내기 시작한 덕에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의사가 배출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또, 신 원장은 준비한 통계자료를 제시해 일제시대 까지 국내에서 활동했던 초기 의료선교사는 총 263명이었고, 이들 중 83.7%가 미국 국적자였다고 밝혔다. 그는 "일제시대 까지 국내에 들어온 초기 미국 선교사들 대부분은 의료선교사였다"며 우리나라 선교 역사에서 미국 의료선교사들이 미친 지대한 영향력을 강조했다.

 

신 원장은 '장기려' 박사를 소개하며 "6.25 이후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던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신 분"이라며 의료비가 없어 곤궁에 처한 가난한 사람들을 무상으로 진료한 장 박사 스토리를 전했다. 이어 장 박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워진 건물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이라고 설명했다.

 

신 원장은 계속해서 "의료선교의 궁극적 종착지는 복음 전파"라며 의료선교의 뿌리는 모든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인권 개념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인권 개념은 모든 사람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시고 그들에게 공평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다. 즉 기독교 정신에서 출발한 인권 개념이 의료선교의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신 원장은 이어 '한국 의료봉사의 흐름'에 관해서도 짚었다. 초창기에는 의료선교사 중심으로 의료봉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다 대학에서 배출된 의사들이 병원을 세우면서 병원 중심의 의료봉사가 시작됐다. 당시에는 의사나 병원이 없는 지역들이 국내에 여러 곳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들을 위해 50년대 이후 무의촌 순회의료봉사가 이루어졌다. 점차 모든 지역에 보건소가 생겨나면서 무의촌 순회의료봉사는 83년 종료됐다.

 

70년대 부터는 국내 의료계에서 최초로 해외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이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해외 의료봉사의 한계를 메꾸기 위해 현지 의료 시스템을 지원해주는 취지에서 국가나 기관 단위에 의한 국제 의료원조도 시작됐다고 한다. 이러한 국내 의료봉사의 역사적 흐름을 신 원장은 "의료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성장했다"고 요약했다.

 

이어 의료선교를 둘러싼 쟁점을 나눈 신 원장은 "선교 초창기 때 의료선교는 선교를 위한 도구일 뿐 선교는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또, 의료선교 활동량에 비해 전도는 잘 안 된다는 비판도 있었다"며 "최근에는 의료선교가 직접 전도는 아니더라도 간접 선교에 기여한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행위 자체가 환자들이 마음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신 원장은 현대 의료선교의 실태와 한계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먼저 현대 의료선교는 대부분 단기선교라고 했다. 이로 인해 환자를 진료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연속성이 깨져버리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클리닉이 충분하지 않은 문제도 거론했다.

 

또, 해외 의료선교의 경우 해외 실정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고 했다. 신 원장은 필리핀으로 의료선교를 나가 환자들을 진료하다가 환자들 중 잘 먹고 과식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고혈압 환자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던 경험을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현지 실정에 밝거나 현지에서 활동하는 의사가 아니면 모르는 일"이라며 해외 의료선교에서 현지 실정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신 원장은 이 밖에도 현지 의료시스템과의 충돌 문제, 현지 법률 준수 문제, 해외 의료선교에 드는 과도한 교통 비용, 지역별 의료자원 불균형 문제 등을 지적했다.

 

신 원장은 의료선교가 봉착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응해 앞으로 의료선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는 ▲ 빅데이터 시대에 진입한 만큼 의료선교에 있어서도 데이터 구축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 ▲ 의료봉사가 전도로 직결되도록 하기 위해 지역 교회, 기관, NGO 등과의 협업이 절실한 점 ▲ 현지 교회, 국가 등과의 긴밀한 네트워크망을 갖추어야 된다는 점 ▲ 의료선교가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현지 병원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 ▲ 적은 재정으로 더 많은 의료봉사를 할 수 있는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된다는 점 ▲ 해당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고 그에 맞게 의료선교 절차를 밟아야 된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신 원장은 의료인이 과학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것이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지켜주는 데 필요하기에 이 또한 새로운 의료선교의 길이라고 설명했다. '과학을 공부하면 하나님을 더 잘 믿게 될 것' 이라는 C.S 루이스의 격언을 인용한 신 원장은 학교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잘못된 과학교육이 어린이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반대로, "비과학적인 창조과학은 도리어 지성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요인"이라며 맹목적인 창조과학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과 학문적 진리에 기반한 올바른 창조과학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신 원장은 "과학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 다 사실은 아니다"며 당연하게 사실로 받아들여졌지만 결국 잘못된 지식이라고 밝혀진 대표적인 사례로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려왔던 '혀의 맛지도'를 들었다. 이어 "잘못된 교육을 한 번 받으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며 신 원장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진화론에 관한 소신도 밝혔다.

 

신 원장은 우선 생물이 진화한다는 데는 옥수수나 벼의 사례를 제시하며 그렇다고 동의했다. 이는 '소진화'로서 한 종이 그 종을 유지하면서 형질만 바뀌는 개념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진화론은 맞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진화를 통해 모든 생명체가 탄생했으며 특히 한 종이 다른 종으로 완전히 변하는 '대진화' 이론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중간단계 화석이 찰스 다윈 시대부터 지금까지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그는 '대진화' 개념을 '진화주의'라고 명명했다.

 

DNA 구조가 발견된 해가 1953년이라고 전한 신 원장은 "DNA가 생기려면 단백질이 필요하고, 반대로 단백질이 생기려면 DNA가 필요하다"며 "진화로 우연히 생물체가 만들어지려면 DNA와 단백질이 동시에 있어야 가능한 일" 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는 절대 우연히 일어날 수 없으며 절대자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신 원장은 레고 장난감을 비유로 들어 "레고를 레고 통 속에다 넣고 오래 흔든다고 해서 잘 만들어진 레고 작품이 나오나?"고 물으며 "레고 조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게 DNA와 단백질구조다. 레고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해도 못 믿겠는데 하물며 생물체가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신 원장은 과학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과학적인 진화주의만 가르치는 학교 교육 현실을 꼬집으며 과학을 깊이 공부하면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직면하는 순간이 오게 될 것이라 전했다. 그는 "하나님의 생물 창조를 부정할 수 없다. 47억년 안에 우연히 고등생물이 만들어지는 건 불가능하다"며 "진화가 가능하도록 하나님이 생명체를 창조했다고 보는 결론이 가장 타당하다"고 했다. 이른 바 지적설계론을 옹호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잘못된 과학 지식은 인권을 등한시하고 유린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신 원장은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자행한 대량살상의 근거가 되었던 믿음이 우생학이라는 사이비 과학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종자에 우열이 있으므로 우등한 종자만 남기고 열등한 종자는 근절해야된다는 그릇된 믿음을 인간에 적용하는 바람에 참혹한 인종학살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신 원장은 “진화주의는 학술적으로도 틀렸을 뿐 아니라 인본주의적으로도 틀렸다고 본다"며 모든 인간을 천부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로 가르치는 성경정신에 기반한 올바른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6440

 


 

의료선교의 본질은 ‘의료’일까 ‘선교’일까

 

1885년 4월 알렌(Horace N. Allen)이 세운 광혜원(廣惠院, 설립 2주 후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이 바뀜)은 당시 조선 정부와 미국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협동의료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병원 건물과 제반 설비 및 관리운영의 경상비를 책임지고, ‘자선기관’인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본부가 의료인력을 파견해 실질적인 병원 운영을 맡은 것이다.

 

광혜원 설립은 기독교에 반대하던 모든 요소들을 암묵적이라 할지라도 일시에 해소했고, 이후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에 진출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개원 후 환자가 급증한 제중원은 1년간 1만여명의 환자를 치료했고, 하루에 외래환자 70명을 돌보기도 했다.
 

제중원을 중심으로 한 의료선교가 조선사회에 천천히 뿌리를 내릴 무렵, 알렌은 1885년 6월 입국한 헤론(J. W. Heron)과 입장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알렌은 아직 서양과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 걷히지 않고 보수 회귀적인 조선의 정치적 상황을 주시하면서 의료 활동을 통한 간접 선교가 기독교 선교를 정착시키는 최선의 정책이라 보고 의료활동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나 헤론은 직접 선교를 원했다. 제중원의 두 축인 이들이 갈등하면서 이는 얼마 후 ‘직접 선교’를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선교사들과 알렌의 불화로 번져간다. 이후 1887년 10월 알렌은 주미 한국공사관 관리가 돼 미국으로 떠나 일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헤론이 이질을 앓다 1889년 소천, 알렌은 다시 원장으로 잠시 임명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선교사들과 알렌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1년여간 재직하던 알렌은 1890년 7월 다시 주한 미국공사관 참찬관으로 임명돼 제중원에서 물러나고, 이후 1891년 5월부터 제중원을 맡게 된 빈톤(Chales C. Vinton)이 헤론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빈톤은 알렌이 나름대로 선교에 공헌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해낸 일들이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봤다. 한국 기독교인들 중 의료사업에 의해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빈톤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기독교를 전하러 온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 됐기 때문에, 기독교가 의료사업 안에 얼굴을 숨기고 활동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요동치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를 도외시하고 오직 직접 전도만을 주장하는 그의 방침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의료 활동에 집중하고자 했던 알렌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빈톤은 의료사업은 그 자체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도를 위한 수단 내지 전제로서만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판단하고 병원 자체를 종교기관으로 변경하고자 했다. 그는 왕립기관이었던 제중원에서 종교 사업이 허락되지 않자 결국 1891년 9월 자기 집안에 진료소를 마련하고 전도사업에 전력하고자 했다. 여기에 마펫(Samuel A. Moffett)이 입국하면서 알렌의 의료사업을 불신하는 여러 중요한 정책방향을 제시하면서, 알렌이 이 기회에 선교부와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런 분위기 속에서 빈톤이 제중원의 의료사업을 포기하면서 병원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

 

당시 선교사들 간의 의견 대립은 “서울에서 병원 업무를 계속해야 하느냐, 아니면 그것은 복음전도를 위해 쏟아 부어야 할 시간의 낭비인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 땅에서 선교사들이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병원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같은 선교사들은 몹시 속을 태웠다.
 

알렌이나 언더우드 등으로 대표되는 의료와 교육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간접 선교전략은 ‘근대성’과 관련해 중요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수구파의 거두인 민영익을 서양의학에 의해 회복시킨 알렌의 성공은 조선인에게 몸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 틀인 민간신앙과 한의학적 사유의 틀을 버리고 몸에 대한 서구적 인식의 틀을 수용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양 교수는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은 개신교를 ‘근대성’의 기호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조선사회에서 개신교의 사회적 공신력을 축적해 가는 계기가 됐다.

 

알렌과 언더우드는 이러한 사회적 공신력 획득이야말로 기독교 선교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토양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따라서 언더우드는 뉴욕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선교사들이 제중원과 계속해서 관계를 맺어야 함을 역설하고, 그 결과 북장로교 선교본부는 이를 허락받는 한편 병원 책임자로 에비슨(Oliver R. Avison)을 임명한다.

 

알렌이 터를 닦아놓은 의료선교는 에비슨에 의해 꽃피게 된다. 병원 책임자로 임명된 에비슨은 제중원의 개혁을 시작하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단독 운영하는 민간병원의 성격을 갖게 되면서 그동안 금지됐던 선교활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다. 근대적 병원으로서의 전문성을 확보하면서도 기독교 복음전파라는 종교적 성과도 이뤄낸 것이다. 그는 제중원이 단순히 병원이나 의학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사·간호사 양성과 같이 종합적인 의료인력 양성기관, 나아가서는 당시 조선의 현실이 필요로 하는 의학연구를 수행하는 연구기관으로 키우겠다는 계획을 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양현혜 교수는 “이러한 갈등 구조는 초창기 선교사들 내에 있었던 의료 선교를 둘러싼 두 가지 입장 차이를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언더우드와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헤론과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등 초기 선교사들은 누구든 교파와 관계없이 알렌과 함께 일하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조선에 들어올 수조차 없었지만, 이 문제는 시대를 초월해 선교 사명을 가진 사람들 안에 있는 ‘뜨거운 감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에비슨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의 의료선교에 대한 철학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는 “처음 선교사로 나간 사람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수하고 소박하게 전파하고자 하는 마음 이외에 다른 의도로 외지에 가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선교지에 가 보면 설교 이상의 무엇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우리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그들의 현재의 참상에서 구출해 주는 실질적 도움을 우선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의료선교사들은 그들의 의료봉사를 그 자체로 그리스도 복음의 일부분인 것으로 믿고 헌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 선교사들이 의료사업은 다만 문고리를 여는 역할, 아니면 장차 복음이 전해질 때 용이하게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예열작용 정도로 그 활동과 의미를 제한하려 했지만, 에비슨은 이를 비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나타내 주는 것이면 그것이 의료든지 교육이든지 설교이든지, 사랑과 유용한 봉사의 형태로 표현되는 한 선교정신의 합법적인 표시”라고 주장했다.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0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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